연재를 시작하며
본 시리즈는 어느 작은 사무실에서 벌어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Faction)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단체, 업종과는 무관하며,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우리들의 치열한 생존 이야기’로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격증은 무용지물, 실전은 함수보다 표 선과 병합의 세계였다.
10년이라는 경력 공백 뒤 다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며, 내가 가장 먼저 붙잡은 것은 컴퓨터활용능력 2급 문제집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스탠드를 켠 채 VLOOKUP, IF 함수, 조건부 서식을 풀다 보면 왠지 실무 엑셀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과값이 정확히 나오고, 문제집 해설과 내 답이 맞아떨어질 때마다 나는 이미 사무실 복귀 준비를 끝낸 사람처럼 뿌듯했다.
하지만 복귀 후 마주한 실제 사무실의 엑셀은 내가 알던 것과 전혀 달랐다.

화려한 함수가 난무할 줄 알았던 내 모니터에는 함수보다 '셀 서식' 창이 더 자주 떠 있었고, 나는 데이터 분석가가 아니라 격자무늬 위에서 표를 다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 제1막. 컴활 2급의 화려한 배신
시험장에서는 1분 1초를 다투며 함수를 넣었다. INDEX, MATCH, HLOOKUP 같은 함수 이름을 외우고, 조건에 맞는 값을 찾아내며 나름 자신감도 붙었다.
그런데 실무 보고서 작성이 시작되자마자 나의 환상은 조용히 무너졌다.
내가 하루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함수는 놀랍게도 =SUM()이었다. 가끔 AVERAGE나 COUNT를 쓰면 스스로 꽤 고급 기능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복잡한 수식을 넣어두면 오히려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도 수정할 수 있게 단순하게 하세요."
그 순간 알게 됐다. 실무 엑셀은 나 혼자 잘난 척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고, 누가 수정해도 망가지지 않는 공유용 문서여야 했다.
그렇게 나의 화려했던 함수 지식은 SUM 함수 아래로 조용히 침몰했다.
📏 제2막. 표 선 하나에 무너지는 퇴근 시간
진짜 고난은 함수가 아니라 양식 맞추기에서 시작됐다.
회사 보고서와 견적서에는 회사만의 미학이 있었다. 바깥쪽은 굵은 선, 항목 사이는 점선, 합계 칸은 이중선. 숫자가 맞는 것은 기본이고, 표가 보기 좋아야 했다.
문제는 이 작업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다. 굵은 선, 점선, 이중선을 번갈아 적용하기 위해 나는 마우스를 들고 셀 서식의 테두리 탭을 수없이 오갔다.
엑셀은 분명 계산 프로그램인데, 어느 순간 나는 선 굵기와 칸 간격을 맞추는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업무인가, 아니면 디지털 자수인가.
상사의 이 한마디는 엑셀 창을 순식간에 계산기가 아닌 그림판으로 바꿔놓았다.
💣 제3막. 셀 병합, 그 금기된 버튼
컴활 시험에서 셀 병합은 간단했다. 범위를 잡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이었다.
하지만 실무에서 셀 병합은 달랐다. 보기에는 깔끔하지만, 한 번 잘못 쓰면 정렬과 필터를 막아버리는 데이터의 무덤이 되었다.
보고서를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제목 칸을 병합하고, 항목들을 묶어 병합하는 순간 표는 예뻐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감 직전, 상사가 말했다.
그 한 줄을 넣는 순간, 이미 정교하게 병합된 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멀쩡하던 표는 갑자기 삐뚤어졌고, 줄 높이와 테두리는 제각각 흩어졌다.
나는 Ctrl + Z를 연타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동료가 조용히 말했다.
그날 이후 나는 셀 병합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잠깐 멈춘다. 이 병합이 정말 필요한가. 지금 눌러도 되는가. 혹시 나중에 한 줄이 추가되는 것은 아닌가.
셀 병합은 분명 보고서를 깔끔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동시에 마감 직전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 이번 화의 생존 교훈
- 실무 엑셀에서는 함수 실력보다 셀 서식 속도가 퇴근 시간을 좌우한다.
- 복잡한 함수보다 누구나 수정할 수 있는 단순한 구조가 더 실무적일 때가 많다.
- 셀 병합은 반드시 데이터 정리가 끝난 최종의 최종 단계에서 하는 것이 안전하다.
- 자주 쓰는 테두리, 병합, 인쇄 설정은 빠른 실행 도구 모음에 등록해두면 정신 건강에 좋다.

10년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화려한 자격증 점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현장에서 매일 부딪히는 사소한 잔기술들이었다.
오늘도 나는 SUM 함수와 씨름하고, 표 선을 다듬고, 병합 버튼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그래도 어제보다 조금은 빠르게 서식을 맞추고, 조금은 덜 당황하며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이것이 복귀 후 내가 다시 배우고 있는 진짜 실무 엑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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